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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곽민정 학우(특수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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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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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인물탐방 곽민정 학우(특수교육학과 07학번) 청각장애를 딛고 한국대표 금메달 선수로 거듭나다
지난 9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2011 서울 제8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에서 영예의 금메달을 수상한 곽민정 동문을 소개합니다. 네이버 메인에(동아일보 기사) 소개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탓던 곽민정 동문!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누구보다 힘겨웠을 감동의 금메달 수상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2살부터 시작된 나와의 싸움
저는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인은 아니었습니다. 2살 때 열병으로 항생제를 복용한 것이 부작용이 되어 청각장애를 갖게 되었어요. 어머니께서는 들을 수 없는 저를 다독여 3살 때부터 발성연습과 한글 공부를 익히게 하셨고, 무던히도 애쓰신 어머니의 노력 덕분에 저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을 하고 사람들의 입모양을 보며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현재 청각장애 2급으로 제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크기는 기차 소리 크기(110dB) 이상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하면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우다다다..." 라는 식으로 명확히 들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보청기를 착용하면 소리의 분별이 가능하고 나의 목소리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 다른 사람과 대화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소리를 내다
학령기에 접어든 저는 청각장애아 특수학교인 서울애화학교에 입학했어요 학교에서는 휴지를 불면서 "후, 파" 하는 단어를 소리를 내는 법과 배를 누르면서 "아" 라는 단어를 소리를 내는 등의 정확하게 발음하는 법(구어 훈련)을 가르쳤습니다. 정확한 발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저로서는 어떻게 소리 내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소리를 내도 잘 내고 있는지, 어디가 틀렸는지 확인할 수 없으니 그저 암담할 뿐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반복해야했던 훈련이 어린 저에게 너무나 지겹고 힘들었습니다. 싫다고 도망치는 저를 붙잡고 끈질기게 교육을 시키셨던 어머니의 열성이 있었기에 듣는 것은 어렵지만 지금처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생활은 오로지 저를 중심으로, 저를 위하여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정작 자신의 삶은 돌보지 못한 어머니께 너무 죄송하고, 가슴이 찡할 정도로 감사합니다.
또 다른 싸움, 사회의 편견!
장애를 가진 제가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이겨내야 했던 것은 말소리 훈련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지속적으로 청인(聽人,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사정이 어려워 취직이 급했던 저는 장애인 취업박람회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취업박람회에 참여한 회사의 열의 아홉은 지체장애인만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청각장애인들이 취직하는 곳은 공장 조립파트나 청소나 설거지 등의 잡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힘든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월급은 다른 장애인의 3분의 2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1시간을 훌쩍 넘겨 박람회장을 돌아다니다가 컴퓨터그래픽 파트의 구인을 원하는 한 회사에 시선이 고정되었습니다. 지체장애인을 모집한다는 회사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면접을 보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한 끝에 면접을 보게 되어 당당히 합격했고, 3개월의 수습을 거쳐 정직원이 되었습니다.
회사 내에는 수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직장선배와 동료들의 배려 덕분에 어려움 없이 업무를 볼 수 있었고, 회사에서도 비장애인 못지않게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제 몫을 해내는 저를 대견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하니까 대화가 안 되겠다'고 단정 짓는 일부 청인(聽人)들의 경향 때문에, 또는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써주세요' 라고 부탁을 하면 귀찮아하며 짜증내는 모습 때문에 저는 마음을 닫고 대화를 회피하기도 했습니다. 청각장애인들은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보는 것이 뛰어나서 상대방이 조금만 신경을 써서 말을 한다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화의 맥락은 알아들을 수 있고, 표정만으로도 상대방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을 아셨으면 합니다. 청각장애인들도 청인(聽人)들을 터무니없이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씩만 더 노력한다면 사소한 오해는 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듣지 못하는 열등감을 독서와 여행으로 극복하다
청인(聽人)보다는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더 좁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항상 책을 많이 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독서는 듣지 못해 놓치는 정보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독서의 진정한 매력은 책 속에서 펼쳐지는 세상에 젖어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달 정기적으로 책을 사고, 도서관의 문턱이 닳도록 끊임없이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한 달에 50권 넘게 책을 빌려 읽어 다독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도서관의 책장들 중에 대부분 제가 읽은 책들로 꽉 차 있는 책장을 보노라면 정말 뿌듯합니다. 열성적인 어머니와 지식의 보고인 책이 있어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행과 사진 찍기는 제 삶의 활력소입니다. 여행을 통해 삶을 배워 나가며 그 가운데 낯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22살 때 3개월 동안 해외 배낭여행을 하던 중 만난 미국 청년과 영어와 국제수화를 사용해 대화를 나누었던 일, 생각지도 못했던 독일인과 의사소통이 되어 기뻤던 일, 중국 청각장애인을 만나 마을 축제를 즐겼던 일 등 국제 곳곳의 사람들과 다양한 경험을 나눔으로써 세상을 보는 시야와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새로운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좌측사진 기차 안에서 만난 네팔 커플(인도 고아). 우측사진 세계 어딜 가나 사람은 똑같습니다(스리랑카 엘라)
꿈을 위한 초석을 다진 배움터, 대구사이버대학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대학 진학을 접었던 저는 때가 되면 공부를 꼭 다시 해보고 싶었습니다. 평소 특수교육학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지난 2007년 대구사이버대학교 특수교육학과에 합격하여 늘 꿈꾸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각장애가 있는 제가 과연 고등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공부를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제 걱정과는 달리 수화통역 서비스가 잘 되어 있어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청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어 마음 편히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특수교육학과의 학우들과 교수님들의 관심과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같은 학과 이수은 학우는 제가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정보도 챙겨 주고, 학교 행사나 학우들과의 모임에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해주었습니다. 얼마 전 대회장에도 찾아와 응원해줘서 정말 감격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준비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을 때 당시 학과장님이셨던 김영숙 교수님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대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대구사이버대학교에서 얻은 지식도 값지지만 제 인생의 현명한 길잡이가 되어 주신 교수님과 항상 힘이 되어 주는 친구를 얻은 것이 제 삶의 큰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좌측사진 이수은학우와 함께. 우측사진 풍선에 소망을 적어
내 삶의 새로운 목표,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한국대표선수
청각장애인 복지관인 청음회관에서 7년 동안 강의를 하면서 기능대회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학생들을 참가시켜 경험하게 했으나 모두 탈락했습니다. 그때 저는 기능대회가 다른 정보화대회보다는 꽤 수준이 높다는 걸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 실력을 평가해보고 싶은 욕심에 참가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컴퓨터 강사인데 수상을 못하면 어쩌나?' 라는 자격지심에 대회 참가를 미루다가 신랑(2007년도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한국대표선수 웹마스터 종목 은메달 획득)의 권유로 결국 기능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복지관에서 강사로 일하기 전에 웹디자인을 한 경력이 있고, 홈페이지 만드는 일에 자신이 있었던 저는 웹마스터 분야를 선택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서 지식 상승의 즐거움을 느끼며 공부를 할 때도 있었지만, 무더운 여름날, 도시의 사람들이 대부분이 휴가를 떠나 휑한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며 사무실에서 혼자 연습을 할 때는 발전이 없는 제 모습과 힘들고 외로운 공부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대회 참가 후 '1등은 감격하고 2등은 비탄에 빠진다.' 라는 말에 마음 속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등은 최고의 대접을 받지만, 2등은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거듭 2년을 2등을 하고 나니 노력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한국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기능대회는 4년마다 열립니다. 하지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은 한 번 참가하면 메달을 따지 못하더라도 다시는 출전할 수 없습니다. 지방기능대회에서 2번의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전국대회 탈락이라는 쓴 고배를 마셨고 몇 번이나 포기할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4년마다 돌아오는 국가대표 선발이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지난 2009년 그토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으며 염원했던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의 웹마스터 한국 대표 출전권을 따내던 순간, 형언할 수 없던 소름과 함께 콧잔등이 찡해졌습니다.
국제의 DEAF(청각장애인)들과 만나 제 자신을 소개하면서 장애인기능올림픽 한국의 국가대표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때 정말 뿌듯합니다.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달려와 결국 이루어낸 제 자신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금메달의 영광
국제장애인올림픽대회에 앞서서는 분당장애인고용공단에서 100일 동안 합숙을 하면서 하루에 8~10시간씩 주말과 휴일 없이 컴퓨터 연습에 매달렸습니다. 제가 워낙 힘들어 하니까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이 많이 안쓰러워했습니다. 제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성적이셨던 어머니조차도 '이만하면 됐다.' 고 말리기까지 하셨습니다.
대회당일 너무 긴장이 돼서 시작할 때 눈앞이 캄캄해지고 계속 실수를 하면서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4년 동안 준비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번쩍 정신이 차려졌습니다. 그 뒤에 집중을 해서 빠른 시간 내에 완성되었는데, 주어진 시간에서 1시간이나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실수가 없었는지?', '이게 마지막 도전인데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그날 겨우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교수님의 축하전화를 받고 정신이 없었어요. 룸메이트 언니들이 울면서 축하해주자 그 제서야 금메달 획득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화장실에 가서 혼자 실컷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신 가족들과 주변의 분들이 생각나고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에 참여하고 싶은 장애인들이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목표를 정해서 꾸준히 정진한다면 자신의 실력을 높이고 사회에서 더욱 당당해 질 수 있을 겁니다.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단체사진
새 희망을 꿈꾸는 장애우들에게 한말씀 하신다면?
장애에 얽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세요! 공부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 과정은 분명 장애를 가진 학우들에게 정말 소중한 재산이 될 것이며,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그 열매가 학우님들의 인생에게 가장 큰 열매가 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어느 곳에서나 적극적으로 학구열을 불태웠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장애인 학우들은 사이버 공간을 벗어나 오프라인에서 왕성하게 활동한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진정한 대학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학우님들이 꼭 용기를 내서 학교행사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동기들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후회 없는 대학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제 꿈은 컴퓨터 공부방을 창업하는 것입니다. 아마 많은 학우님들이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부부가 모두 입상했다면 부부 모두 괜찮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을 거라 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기능올림픽 금메달이 인생 자체를 바꿔주진 않는다는 것을 저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 남편은 지난 2007년에 열린 7회 장애인기능올림픽 웹마스터 종목에서 은메달을 땄었습니다. 남편의 격려와 지원이 없었다면 저는 올림픽대회에 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를 과외 해주었던 스승이었기에 남편의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 은메달 수상자라는 영예가 무색하게도 남편은 관공서와 기업의 수십 곳의 웹마스터 일자리에 지원했지만 모두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습니다. 저희 부부는 올림픽 메달 경력을 바탕으로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를 대상으로 해서 일대일로 컴퓨터를 교육시키는 컴퓨터 공부방을 계획 중입니다.
저는 늘 희망에 가득 찬 미래를 꿈꾸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든 시련이 있을 테지만, 꿈은 결국 이루어질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꿈은 곧 현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저는 항상 굳게 믿고 있습니다.
곽민정 학우 영상 바로가기 이미지 인터뷰속의 인터뷰
'곽민정 학우'를 말하다

(특수교육학과)
2011-09-29 donga.com
소용없는 금메달이지만 그래도 난 따야만 했다. 서울 장애인기능올림픽서 웹마스터 종목 金 곽민정 씨
곽민정 학우 사진 및 올림픽 사진 2011년 서울장애인기능올림픽에서 한국대표팀의 첫 금메달을 따낸 곽민정 씨(왼쪽 사진)가 2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장애인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곽 씨(가운데)가 27일 대회에 출전한 모습.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제공

알아듣기 힘든 발음이었지만 곽민정 씨(31·여)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2세 때 고열로 청력을 잃은 뒤 타인의 입술을 보며 '말'을 읽어 왔다. 3세부터는 자신의 발음이 어떻게 들리는지도 모른 채 어머니가 배를 누르는 대로 발성 연습을 했다. 2급 청각장애인인 곽 씨는 현재 서울에서 열리는 제8회 장애인기능올림픽 한국대표팀의 첫 금메달리스트다.

28일 대회장인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만난 곽 씨는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웹마스터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곽 씨는 정식 공부 대신 2000년 웹디자인 회사에 취업하며 몸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익혔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지만 취업할 수 있는 곳은 공장밖에 없었다"며 "어렵게 컴퓨터그래픽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아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곽 씨는 "단 한 번의 기회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도 했다. 직장생활 3년간 쌓은 컴퓨터 실력은 곽 씨의 인생을 바꾼 원동력이 됐다.

곽 씨는 2004년부터 청각장애인 복지관인 서울 강남구 역삼동 청음회관에서 다른 장애인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램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지방 장애인기능경기대회와 전국대회에 출전했다. 결과는 계속된 낙방. 하지만 심기일전해 기능올림픽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장애인기능올림픽은 한 번 참가하면 메달을 따지 못하더라도 다시는 출전할 수 없다. 수년 동안의 연마 후 기량이 최고에 도달했을 때 도전했다. 곽 씨는 "올해 내내 1등을 하기 위해 수영장 열쇠도 1번 열쇠를 받았다"며 "여러 번의 실패가 결국 이번 대회 금메달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능올림픽 금메달이 인생 자체를 바꿔주진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곽 씨의 남편인 이제명 씨(36) 역시 청각장애인이자 장애인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다. 이 씨는 2007년 일본 시즈오카(靜岡)에서 열린 7회 장애인기능올림픽에서 아내와 똑같이 웹마스터에서 은메달을 땄다. 아내에게 장애인기능올림픽에 출전할 것을 권유한 것도, 웹마스터 독학을 도와준 이도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직업이 없다. 곽 씨는 "남편이 관공서와 기업 수십 곳의 웹마스터 일자리에 지원했지만 모두 받아주지 않았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청각장애인은 전화 업무가 불가능하다. 동료와의 소통을 통해 인터넷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개선해야 하는 웹마스터에겐 청각장애가 치명적인 결함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측은 "기업마다 3%의 장애인 의무고용비율이 있지만 청각장애인에게 사무직 업무를 맡기는 곳은 거의 없으며 채용되더라도 금방 해고되곤 한다"고 말했다.
곽 씨는 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공부방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어린 장애인에게 멘토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그는 "고교 졸업 무렵 학교에서 나에게만 일자리를 알선해 주지 않았을 때 '왜 나를 이렇게 낳았느냐'며 부모님을 원망했다"며 "인생을 놓고 고민하는 스무 살 장애 청년들에게 내가 길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장애인 기능인 곽 씨가 우리 사회에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 곽 씨는 일반인에게 생소한 '지화(指話)'가 교육 과정에 들어가길 원했다. 지화는 손가락을 이용해 한글 자모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단어 모두를 익혀야 하는 수화(手話)에 비해 배우기 쉽다. 그는 "세상이 장애인에게 비장애인의 삶을 강요하는 만큼 짧은 순간이라도 장애인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금메달을 딴 한국 선수는 모두 11명. 곽 씨 외에 이영민(귀금속공예) 모병옥(가구제작) 문승진(양장) 임민상(전자 CAD) 양우희(시각디자인) 곽재철(전자기기) 권혁진(제과제빵) 송재환(화훼장식) 김기형(CNC선반) 임재원 선수(e-스포츠) 등이다. 2위 대만이 금메달 2개를 딴 점을 고려하면 이번 대회 우승도 거의 확정적이다. 한국은 1995년 4회 호주 퍼스 대회부터 2007년 7회 일본 시즈오카 대회까지 4회 연속 우승해 이번 대회까지 우승하면 5회 연속 장애인 기능 세계 1위가 된다.

※ '동아일보' 2011.09.29 기사 발췌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기사 바로가기 : http://news.donga.com/3/all/20110929/406933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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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도수2011-11-16 오전 12:25:49
    대구사이버대학교 특수교육학과에 참으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곽민정 선배님 화이팅¡¡¡ ^^
  • 이국정2011-11-16 오전 11:08:11
    누구에게나 기회는 공평하게 있지만 그 기회를 잡는 사람은 준비된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분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각장애인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이루어낸 성과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재들이 널리 쓰일 수 있는 우리 사회 저변의 편견들이 빨리 해소되었으면 합니다.
  • 김소섬2011-11-16 오전 11:11:48
    예쁜 민정샘... 화면으로 보니 더 이쁘네요.. ^^ 오래 대화를 하지 못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항상 자신 있는 모습과 밝은 미소가 생각나네요... 앞으로는 더~욱 좋은 일들만이 가득할거예요...
  • 이진형2011-11-16 오후 6:51:36
    너무, 아름답다¡ 당신의 삶이, 너무 너무 사랑스럽다. 당신의 열정이, 너무너무너무 부끄럽다. 당신의 고결한 영혼을 보니, 너무너무너무너무 행복하다. 당신과 동시대를 숨쉬고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드릴뿐입니다.
  • 송유미2011-11-17 오후 12:03:55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다는 거, 흔치않은 거죠. 곽민정 학우님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래서 세상이 더 아름다워 집니다. 앞으로 좋은 일들이 많으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 홍은영2011-11-17 오후 8:46:32
    내가 봤던 그 곽민정샘인가?? 했네요. MT사진 보고 내가 아는 곽민정샘이 맞구나¡¡ 했습니다. 너무나 멋지십니다. 어느새 그때 잠시뵙던 남친이 남편이 되셨군요.ㅋㅋㅋ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 장신향2011-11-18 오전 7:43:14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던 민정씨 ¡¡ 곱고 이쁜 신랑도 잘~지내시지요? 학과 행사에서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서운했는데 이렇게 큰 일을 해 내느라고 많이 힘들었었군요^^말보다 행동으로 꿈의 실현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과에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인거 같아서 아주 많이~~행복합니다.
  • 김영숙2011-11-19 오전 9:05:13
    축하를 보냅니다. 그때 그 앳되고 너무 예쁜 모습으로 그 먼곳에서 얼마나 고민을 하였길래 날 찾아왔었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머니와의 통화에서도 그 애정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지요.지금도 여전히 어여쁜 마음이 그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반갑습니다. 수은씨라...그렇게 졸업도 안하고 서울지역장만 시키는대로 하길래 볼때마나 놀려주었는데, 민정씨 쫓아다니느라 그런걸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ㅎㅎㅎ¡ 지금은 뭘하고 지내나¡¡¡그래도 말없이 조용히 아이같은 순수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친구지요. 당시에는 민정씨만큼이나 우리학과에서는 나이가 어린친구였지요. 인사전해주세요. 그리고 항상 건강챙기시고 신랑과 축복의 인생시간으로 충만하기를 바래요.진심으로 행복을 보냅니다.
  • 전영주2011-11-21 오후 2:12:26
    감사하지 못하면서 살아온 제 삶이 너무 부끄러워지네요..... 좋은글 감사해요 그리고 민정님의 어머니 존경합니다.
  • 이화정2011-11-22 오전 10:28:52
    살아가는 삶에서 장애 비장애를 떠나 희망을 안겨 주시네요^^ 출근해서 학우님의 글을 보고 저두 더 큰 희망을 가져봅니다.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
  • 강순일2011-11-28 오후 3:55:27
    큰 박수를 보냅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멀쩡한데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했던 제 자신이 정말로 못나 보입니다. 민정님의 앞날에 찬란한 태양이 비추기를 기원합니다. 어렵고 힘든일을 견뎌낸 당신은 챔피언이고 나의 희망이고, 우리의 희망입니다. 즐거운 날들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 백은정2011-12-01 오후 6:42:14
    와..이렇게 우리학교에 훌륭한 인재들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격스럽습니다..우리가 이렇게 좋은 에너지를 서로 나눠주는 장이 앞으로도 게속 있었으면 좋겟습니다..민정학우님..앞으로 다가올 날에 큰 축복이 있길 기원합니다¡¡
  • 곽민정2011-12-07 오후 3:07:04
    감사합니다. 조만간 취직할 것 같습니다. 모두 축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김미숙2011-12-10 오후 11:16:30
    곽민정 선배¡¡ 화이팅입니다. 아름다운 질주 계속 이어주시길요.. 남편과도 아름다운가정 이루시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아시죠?
  • 이무성2011-12-21 오후 12:38:12
    학우님 정말 저의 일처럼 기쁘고 눈물도 핑돌고 ..ㅎㅎ 저도 막내가 다운증후군이면서 청각장애가 있었기에 정말 학우님의 기쁨이 저의 일 같네요 아이가 청각장애가 있었다는것은 지금은 정상청력을 회복했기에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ㅎㅎ 청각장애 4급이었던 아이가 지금은 정상 청력이 되었네요 기적이 일어난거죠 학우님께도 앞으로 더욱 많은 기적의 기쁨이 넘치길 바래요^^
  • 이선주2011-12-26 오후 1:53:34
    학우님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제모습이 부끄럽네요~꼭 좋은곳에 취직하셔서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 박세나2011-12-29 오후 5:08:09
    대박¡¡ 너무 멋지다~~ 늦었지만 너무 너무 축하해요 ^-^
  • 이진희2012-01-07 오후 4:12:15
    정말 대단하십니다...우리학교를 빛내주신 곽민정 학우님 밝은모습 ..정말 귀감으로 삼고 더 열심히 전진하겠습니다..정말 축히드립니다....
  • 백승훈2012-01-10 오후 4:11:29
    애화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제 친구를 통해 들었습니다.^^ 늘 지금처럼 다른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민정씨가 되길 바라며 정말 보기 좋습니다.^^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