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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어요. 다섯 자매 중 막내라 어려서 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컸답니다. 학창시절에는 조선학교에 다녔는데 그러다보니 유년시절 차별도 많이 받았어요.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국 이름을 숨기는 경우가 많죠. 저희 집은 달랐어요. 처음부터 이양자였고 지금도 이양자에요. 그래서인지 학창시절 친구들과 더욱 서로 뭉치고 의지할 수 있었고 때문에 관계가 더 좋았던 거 같아요. 지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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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일본에서 태어나셨어요. 때문에 한국의 여느 부모님처럼 공부를 강요하거나 부담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도록 하셨죠. 자영업을 하시는 아버지는 일에만 몰두하시고 집안일이나 교육은 어머니가 하셨어요. 저도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나봐요. 저도 5살과 3살의 아이들을 둔 엄마인데.. 부모에 의해 학교공부에 학원공부에 파묻혀 사는 친구들을 보면 불쌍하단 생각이 앞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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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때 부산을 처음 가보게 되었어요. 그때 느낀게 “한국은 정말 정이 깊은 나라다.” 일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더라구요. 그 당시에 부산분들은 일본에서 온 사람은 다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봐요. 제가 한국말을 잘하니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때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거 같아요. 그래도 한국에서 살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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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부모님께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열심히 하라"는 말씀하셨어요. 그때 말씀을 인생의 지표로 삼고 살던 중에 중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책을 한권 선물 받았습니다. '한없이 상냥한 꽃들' 이란 책이 였는데 바로 '호시노 토미히로' 라는 작가의 책이였습니다. 호시노 선생 님은 중학교 체육교사가 된 그 해 6월, 클럽활동 때 학생들 을 지도하다 불의의 사고로 목뼈 손상을 입고 장애를 가지게 되신 분이에요. 그 후 입으로 모필이나 연필을 물고 글을 쓰기 시작해서 그림과 함께 시집과 책을 내셨는데 일본에서는 유명한 분이세요. 그분의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그전까지는 장애인을 보면 무섭다고 느꼈어요. 허나 이건 누가 가르쳐 준게 아니에요. 본능적으로 장애인을 보면 무섭다고 느끼는게 너무 이상했어요. 근데 그 책을 읽고 난 다음 눈물이 나더라구요. "내가 잘못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 후에 장애인에 대한 책을 찾아다니며 읽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장애인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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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고르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조선학교를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해주는 대학 중 한곳을 골라야 했으니까요. 그러던 중 근교에 있었던 쿄토보육복지전문학교가 눈에 띄었어요. 보육학과를 진학하고 싶었는데 이유는 선배들이 장애인 시설 쪽으로 진출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더군요. 그래서 별 고민 없이 진학을 했습니다. 물론 대학생활도 만족스러웠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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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지양학원은 조금 특이한 시설이에요. 후꾸이다쯔우 원장님의 남다른 가치관 때문이지요. 장애인 식구들이 40명인데.. 선생님이 30명이에요. 왜 다른 시설보다 배치된 선생님이 많은가는 직접 가보고 해답을 찾았어요. 장애인 시설은 보통 첨단 기구나 장비에 의존해서 시설을 유지하기 마련인데 지양학원은 직접 선생님들이 손수 아이들을 보살피려고 노력하더라고요. 새로 직원이 오면 장애인 식구들이 사용하는 화장실 청소를 제일 먼저 시킵니다. 거기서 본인이 이불을 피고 잘 수 있을 정도로 청소를 하라고 원장님께서 요구를 하셨어요. 이유는 신입직원이 오면 이러한 정성을 통해 장애인 식구들에게 신뢰를 얻고 진짜 가족이 되라는 이유라고 하셨어요. 저도 3주간의 실습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러고 나서 졸업 후에는 저의 희망대로 지양학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거에요. 1년 정도 지날 즈음 2000년 가을 어느 날, 정혜원을 운영하고 계셨던 현재 시어머니와의 인연이 시작 되었어요. 시어머니께서는 30년 전부터 매년 지양학원을 방문하셨더라고요. 같은 한국인이라 너무 반가웠어요. 오셔서 일주일간 같이 생활을 하셨는데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후 2006년 가을. 어머니가 아드님과 함께 일본으로 연수를 오셨어요. 그때가 신랑과의 첫 만남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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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였던 신랑은 3개월 연수 과정으로 지양학원에 왔어요. 처음에는 무척 부끄러워하더라고요. 일본말을 못해서인지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지양학원에 대한 좋은 감정을 전해주려 무척 노력했어요. 그게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나봅니다. 한 달 정도 지나고 나서 이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제 나이가 27살이었어요. 한국에서 생활을 해야되는데 당장은 그런 걱정도 안 되더라고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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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님이 3년 전 돌아가셨어요. 그때가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 시집왔을 때부터 지병이 있으셨어요. 건강하셨으면 함께 여행도 다니고 했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비록 몸은 불편하셨지만 저에게 무척 잘해주셨거든요. 제가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주셨어요. 가끔 한국말이 서툴러서 일본말로 수다를 떨고 싶은데 친구들이 아무도 없으니 향수병이 생기더라고요. 그땐 정말 일본의 부모님들이 많이 그리웠는데...지금은 정혜원 식구들하고 사는 게 적응이 되니 자연적으로 괜찮아지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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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양학원은 인원이 많아서 뭘 해도 손이 부족하지 않았어요. 운동회도, 크리스마스 행사도, 사람들 일손이 많으니 좋았어요. 정혜원은 그냥 가족이에요. 10명이 단란하게 여행도 하고 식당도 가고... 남편은 이게 일이라고 생각하면 못한 다네요. 같이 사는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된다고 항상 말해요. 저도 그 말이 처음엔 이해가 안 되다가 막상 겪고 보니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아마 이때부터 마음도 편해진 거 같아요. 정부의 지원이 일본과 차이가 많이 나요. 한 가지 예로 일본에는 휠체어전용도로가 있을 정도에요. 작은 정혜원은 작은 규모의 시설이라 정부의 지원이 없어요. 개인이 운영하는데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 그런 면에서 일본의 복지정책은 한국이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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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건 없어요.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은 식구들과 나들이를 나가요. 평소에는 인근에 있는 동네 어르신들께서 책읽기 봉사를 오시고 미술치료선생님이 또 봉사를 오시기도 해요.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는지 몰라요.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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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대 시절에는 제가 잘하는 일본학과를 골랐어요. 상대적으로 쉬웠죠. 지금은 저에게 필요한 특수교육을 하다 보니 배울 점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정혜원 가족들에 대한 문제가 바로바로 이해되고 해결할 수가 있어요. 공부 하다가 모르는 건 질문해서 풀어요. 그래도 저에게 시험은 너무 어려워요ㅜ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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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도 일반인과 똑같이 하고 싶고 가보고 싶은 게 많아요. 특히 외식하기나 영화보기는 장애인들도 너무 하고는 싶지만 엄두가 잘 나지 않아요. 정혜원 식구들이 더 큰 시설에서 함께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지양학원처럼 일손이 많아 함께 여행도 쉽게 가고 행사도 쉽게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고 현실적으로는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져 함께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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